2차 세계대전의 원인? ...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세계공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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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2차 세계대전의 원인? ...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세계공황'은?

by 소식쟁이2 2024. 9. 18.

2차 세계대전의 원인? ...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과 '세계공황'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9년경 미국에서 발생한 '세계 공황'은 나중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리먼 쇼크'나 '코로나 쇼크' 등 세계적인 주가 대폭락이 있었는데, 왜 1929년 주가 대폭락이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을까요?

1929년 10월 25일, 금요일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권 매도가 전날부터 계속 패닉 상태가 된 가운데 증권 브로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날 주가 폭락은 세계적인 불황과 금융위기를 일으켰고, 이 때문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 1929년 월가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주가 폭락이 발생했습니다.

이 폭락은 '월가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으로 불리며 미국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경제적 혼란을 야기한 것입니다.

특히 10월 24일의 '검은 목요일(Thursday)'와 이어진 10월 29일의 '검은 화요일'은 역사적인 대폭락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가 되지 않았던 미국은 자동차 생산과 주택건설 등을 중심으로 경제가 호조를 보였고, 은행은 대출을 완화해 주가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주가가 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주식을 사고(신용거래), 투기는 점점 과열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실물경제에서는 생산능력이 수요를 크게 웃돌아 재고가 남아도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월가 대폭락'이 일어난 뚜렷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큰 요인으로는 이 상품의 생산 과잉상태가 투자자들의 매도를 부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세계 공황의 발단
세계공황이 일어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월스트리트 대폭락(Wall Street Crash)'이 계기가 되어 세계공황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29년 대폭락 후 월스트리트로 몰리는 군중


불안에 휩싸인 예금자들은 은행에서 일제히 예금을 인출하려 해 많은 은행이 대응하지 못하고 도산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기업에 대한 대출이 멈추고 기업이 도산하고 공장이 문을 닫고 근로자 해고가 잇따랐습니다.
실업자는 급증하여 1933년에는 미국의 실업자 수가 전체 인구의 약 10%에 달했습니다.

이 공황은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트랙터 구입 등에 따른 기계화로 농업생산이 효율화되고 과잉생산이 진행되던 차에 공황이 몰아치면서 농산물 가격이 급락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농업경영자의 대부분이 파산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미국 대통령 후버는 정부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방임주의'를 믿었습니다.
"시장에 맡겨두면 경기가 저절로 회복된다"며 정부의 개입을 손놓고 있은 결과 대응이 늦어지고 공황의 여파는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 미국의 공황이 전 세계로 확산된 이유



그렇다면 미국의 주가폭락이 왜 세계 전체에 휘몰아치는 공황으로 발전했을까요?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전후 복구가 미국의 투자에 의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독일에 거액의 자금을 공급하고, 독일은 그 자금으로 경제를 살리고, 영국이나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구조였습니다. 이 구조 속에서 영국이나 프랑스는 미국에 대한 전시 차관을 상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공황이 발생하고 미국이 독일에 대한 자금공급을 끌어올리면서 유럽 전체의 경제가 정체되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거액의 배상금 지불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국의 자금공급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 보호무역주의와 블록경제
미국은 공황에 대한 대책으로 관세를 인상하고 수입을 제한하는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했습니다. 한편, 영국이나 프랑스는 본국과 식민지를 중심으로 한 경제권을 형성해, 타국의 상품을 배제하는 「블록경제」를 펼쳐나갔습니다.

이 결과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식민지를 갖지 못한 국가들은 식민지 획득을 위해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목표로 해 국제사회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적인 경제압력과 식민지 확대로의 움직임이 최종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큰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

던버튼 오크스 회의(나중의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채택된 유엔헌장의 기초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헌장이 채택되어 '국제연합'이 출범합니다.
국제연합은 세계대전이라는 큰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 그리고 각국 간의 협력과 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본부는 뉴욕에 있고, 가입국은 1표의 투표권을 가집니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다수결로 결정되지만 상임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중 어느 한 나라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 의안은 부결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거부권 행사로 인해 분쟁이나 문제해결이 지연되고 장기화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최근에는 이 거부권 제도에 대해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면에서는 1944년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 BWS는 브레턴우즈 회의에 따라 구축된 국제통화체제)가 구축되었습니다. 이 체제는, 국제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유지해 각국이 경제성장을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 은행(IBRD)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체제에서는 미국 달러와 각국 통화의 교환비율을 고정하는 '고정환율'이 채택되어 1973년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현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변동환율제가 채택하고 있습니다)

또한 블록경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국제 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 수립되었습니다. 현재 GATT는 세계무역기구(WTO)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공황을 배경으로 각국이 자국 경제를 우선시하면서 국제적 갈등이 심화된 결과로 발발했습니다.
그 후에도 리먼 쇼크나 코로나 쇼크와 같은 경제위기가 있었지만, 1929년과 같은 대규모 세계 공황은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경제 연계가 나름대로 기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체제는 항상 변화가 요구되고 있으며, 새로운 과제가 나타나도, 앞으로도 각국이 협력해 대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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