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에 의한 1970년대 한국 핵무기 개발계획 좌절시킨 미국의 주도면밀한 방법
본문 바로가기
시사, 경영

헨리 키신저에 의한 1970년대 한국 핵무기 개발계획 좌절시킨 미국의 주도면밀한 방법

by 소식쟁이2 2024. 8. 10.

헨리 키신저에 의한 1970년대 한국 핵무기 개발계획 좌절시킨 미국의 주도면밀한 방법

알려진 대로 한때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해 보유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계획은 좌절되었고,  현재는 북한과 군사적 비대칭전력으로 현실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였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무장관이 별세했다.
그는 미국 닉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미·중 국교정상화 등 미국 외교에서 크나큰 역할을 했던 헨리 키신저가 2023년 11월 30일 별세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군에서 독일어 통역을 맡았다. 전후 하버드 대학에서 국제 관계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닉슨 행정부와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 등을 지냈다.

헨리 키신저는 독일의 작은 마을 푸르트에 있는 소규모 게토(강제 거주구)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는 나치에게 살해당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본인과 부모, 남동생은 1938년 후반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독일을 떠나는 것에 그의 일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5세의 소년은 영어를 한마디 못하고 장래에 대한 기대도 거의 갖지 못했다. 맨해튼공립고등학교에 다녔고 밤에는 일해서 가계를 도왔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그는 육군에 입대하였다. 전쟁 후 그는 육군의 추천서와 복원군인원호법 덕분에 키신저는 하버드대에 입학할 기회를 얻었다. 하버드대에서 키신저 는 유럽에서 이주한 신세대 학생, 학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데 협력할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한 문명 파괴를 저지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체제란 소련을 가리킨다.

그는 1971년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비밀협상을 벌였으며,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다. 급격히 진행된 미·중 화해는 미국 동맹국들에게도 큰 충격을 줘 닉슨 쇼크로도 불렸다.

■ 한국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 좌절된 핵무기 개발 시도

그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평가가 양분되고 있지만, 키신저 외교가 한국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그리고 한국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결론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1970년대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좌절한 역사를 갖고 있다. 북한이 아니다.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좌절된 한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의 역사에서, 너무나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당시 미 국무장관 등으로 일하던 키신저였다.
미국의 공문서, 외교문서에 근거로 상황과  일부 한국 정부 당사자들의 증언도 함께 살펴본다.

■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애초에 왜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을까?
우선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전반에 걸쳐 당시의 한국 안보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한국의 안전보장 환경이 많이 악화된 것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군사분계선에서는 722건의 사건이 일어났고, 후방 지역에서도 294건의 사건이 일어났었다.

해당 내용을 모두 언급할 수 없지만 크게는 청와대 피격 미수사건(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1968년), 미 해군 EC-121기 격추사건(1969년) 등 북한과 관련된 큰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북한 공격 도발에 대해 미국은 한국이 주장한 것과 같은 평양 공습 등은 하지 않았다. 대응을 자제한 것이다.

이어 닉슨 행정부가 1969년 시작되자 키신저가 주축이 돼 새로운 외교정책이 입안됐다. 「닉슨·독트린」의 발표이다. 종전의 외교정책과는 달리 베트남전과 같은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자제하고 주축을 간접적인 군사지원이나 경제지원으로 전환한 것이다.
실제로 베트남을 포함한 아시아에서의 미군 철수는 극적으로 이뤄졌다. 1969년 1월 72만여 명에서 1971년 12월 28만여 명으로 줄었다. 주한미군은 6만 3000명에서 2만 명으로 감축됐다.
이에 다급해진 것이 한국의 정권이었고, 당시 대통령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의 부친)다. 자주국방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박정희는 북한 공격과 미군 철수에 대응해야 했다.

미국에서 버림받을지도 몰라...그 공포에 질린 박정희가 선택한 것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이었다. 프로젝트 890으로 불리는 계획이다. 박정희는 개발 담당자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김종필 당시 총리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핵무기를 연구해야 한다. 언제 미군이 모두 철수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국을 지킬 무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이 시작되었다.그것은 대체로 1973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그만두라고 재촉하지 않는 미국

한국은 자국 기술만으로는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그 기술과 재처리 공장을 수입하려고 했다. 폐연료를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을 획득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다만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원자력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는 명목이었다. 동시에 한국은 캐나다에서도 원전을 수입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인도의 핵실험(1974년)이 이뤄진다. 세계적으로 핵 확산 공포가 고조됨에 따라 미국은 동맹국 등이 핵무기를 개발할 움직임이 없는지 신경을 쓰게 됐다. 그리고 미국 외교관과 정보기관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밝혀냈다. 이에 미국은 얼마나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좌절시킬 것인가를 놓고 외교전을 벌이게 된다.

한국 측과의 협상에 주로 나선 것은 주한 미대사관 외교관들이었다. 물론 한국에 대한 외교정책은 국무부나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디자인돼 세세한 지시가 내려져 있다. 키신저 하에서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시키지 않는다'는 외교정책이 수립된 것은 분명하다.

BBC 뉴스의 한 기사(2023년 4월 28일)에서는 <한국은 1970년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핵개발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기존 핵무기를 모두 사용해 한국을 방어할 것인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최후통첩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미국의 외교문서를 샅샅이 읽어보면, 미국은 이런 일을 압박하지 않았다. 더욱 미묘한 절묘한 외교전,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의 협상에서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라고 직접적으로 압박한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계획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면서 프랑스에서 기술과 재처리 공장을 수입한다는데 그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라고만 전했다. 남측도 어느 누구도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로 핵무기 개발계획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며 협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한국 뿐만 아니라 프랑스, 캐나다에 대해서도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한국은 핵무기 개발을 하려고 한다. 미국은 한국의 계획을 멈출 것이라고 전했다. 프랑스는 양해했다.

키신저는 캐나다에 대해서도 한국의 계획을 전달한 것 외에 핵개발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한국이 획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캐나다식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시키지 말아 달라」라고 요청했다. 캐나다도 사태의 위험성을 알고 양해했다. 한국과의 계약에 조건을 붙이게 됐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한 외교적 환경을 미국은 조성한 것이다.

■ 지금도 영향력 있는 키신저의 외교 정책

남측 사료가 부족해 언제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는지는 특정하기 어렵다. 단지,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공장의 수입은 1976년 1월에 단념했다. 이때를 기해 한국의 계획은 사실상 좌절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이 프랑스로부터의 수입을 포기한 동시에 미국은 대가로 원자력 분야에서의 기술협력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하여 1970년대 한국에 의한 '핵무기 개발이라는 꿈'은 깨졌다.

미국 외교문서를 볼 때 한국이 미국의 눈을 피해 핵무기 개발을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이 비밀리에 추진하려던 계획은 미국 정보로 모두 빼왔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에는 인도처럼 새로운 핵실험을 하는 나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무엇보다 핵무기 비확산조약(NPT)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핵무기 개발은 절대 안 된다는 규범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자칫하면 한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을 가능성도 역사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존재했던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키신저가 디자인한 미국의 외교전략에 따라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다. 키신저의 외교정책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재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보았을 때, 만일 키신저의 오산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국과의 관계이다. 미·중 갈등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현재의 미·중 갈등은 키신저의 외교적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1970년대 이후 미국이 만드는 국제질서를 이해하려면 우선 키신저의 외교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영향력 있는 외교가였다. 앞으로도 중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재미있거나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 꾹 눌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