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콧(Boycott)'의 유래가 된 19세기 아일랜드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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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보이콧(Boycott)'의 유래가 된 19세기 아일랜드 사건은?

by 소식쟁이2 2024. 3. 27.

'보이콧(Boycott)'의 유래가 된 19세기 아일랜드 사건은?

보이콧(Boycott)이란 한 집단이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상품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나 특정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조직적으로 거부하는 것과, 권력자를 배척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며, 일전에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보이콧' 최근에는 '축구 아시안컵 이후 국가대표 축구 보이콧' 등이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 이 '보이콧(Boycott)'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아시나요?
사실 이것은 19세기 아일랜드에서 발발한 한 농민운동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영국 육군의 전 대위인 찰스 보이콧(Charles Boycott)이 있습니다.

◆ 19세기 아일랜드 토지전쟁은?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토지전쟁(Land War)'이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당시 영국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었고, 많은 아일랜드 농민들이 영국인 지주로부터 토지를 빌려 소작농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인 지주들은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임대료 인상과 불안정한 임대계약, 부조리한 퇴거 같은 폭정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처사에 반감을 느낀 농민들이 아일랜드 전역에서 항의의 목소리를 내면서 시작된 것이 아일랜드 토지전쟁이었습니다.

지주로부터 퇴거를 강요당하는 아일랜드 농민의 일가(1879년)



◆ '보이콧'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사건
찰스 보이콧(1832~1897)은, 영국 육군의 대위로서 종군하고 있었지만, 퇴역 후의 1873년에 아일랜드 북동부 메이요 카운티에 있는 라프마스크 지구로 왔습니다.
 *Charles Cunningham Boycott (March 12, 1832 – June 19, 1897)

그는 그곳에서 영국인 지주인 에른 경의 토지대리인으로서 대신 그 지역의 토지관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보이콧은 다른 영국인 지주들에게 영향을 미쳐 농민들에게 횡포를 일삼았습니다.
터무니없는 임대료나 가차없는 퇴거는 물론, 매우 세밀하고 이기적인 규칙을 마련해, 그것을 위반한 농민에게는 벌금을 부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을 열어 둔 것만으로 벌금이라든가, 그의 부지에 닭이 들어간 것만으로 벌금을 메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찰스 보이콧 캐리커처(풍자화, 1881년)


그리고 1879년경부터 아일랜드에서는 농작물 흉작으로 인한 기근이 발생하여 농민들은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해 졌습니다.
이에 농민들은 집세 삭감을 요구했지만 보이콧은 이를 즉각 거부합니다 .
터무니없는 임대료 강요를 멈추지 않고 임대료를 낼 수 없는 농민에게는 퇴거를 계속 강요한 것입니다.

마침내 인내심을 잃은 아일랜드 농민들은 1880년 보이콧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기 위한 대담한 전략을 짰습니다.
아일랜드 토지연맹의 유명한 멤버를 중심으로, 비폭력에 근거한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개시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 저항운동의 목적으로 3F: 공정한 임대료(Free sale), 소유권 고정(Fixity of tenure), 자유로운 매각(Fair rent)을 내걸었습니다.
이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운동으로서 보이콧이 소유한 토지에서의 노동, 보이콧의 이익이 되는 거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한 것입니다.
이 같은 저항운동 아이디어는 아일랜드 정치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1846~1891)의 발의를 바탕에 두고 있다.

아일랜드의 정치 지도자 파넬


그는 노동과 거래에서의 철수뿐만 아니라 보이콧을 지역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1880년 9월 19일에는 아일랜드 농민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콧을 「쏴 죽여라!」라고 하는 군중의 외침에 대해…... )
「나는 당신에게 더 나은 방법, 즉 방향을 잃은 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더 기독교적이고 자비로운 방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 자가 농민을 퇴거시키고 땅을 빼앗았다면 당신은 길가에서도, 동네 거리에서도, 가게에서도, 시장에서도, 예배당에서도 철저히 그를 피하고 홀로 내버려 두면서 옛 한센병 환자인 것처럼 고립시키고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혐오감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농민들은 파넬이 보여준 비폭력 운동을 철저히 했고, 마침내 보이콧은 그 땅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1880년 12월 1일에 아일랜드를 떠납니다.
1886년에는 잉글랜드 동부의 서퍽주에서 다시 토지대리인이 되었지만, 그 직후 병으로 쓰러져 1897년 6월 19일에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시 나이 65세였습니다.

이 아일랜드 농민들의 비폭력 운동은 메이요 카운티를 넘어 넓은 지역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혁신적인 항의 방법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저널리스트나 (라디오·TV의 뉴스 등) 해설자(commentator)가, 사회적·경제적인 불복종·배척 운동을 칭해 「보이콧(Boycott)」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보이콧(Boycott)'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이러한 아일랜드 농민의 저항운동이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Charles Cunningham Boycott (March 12, 1832 – June 19, 1897) was an English land agent who became infamous after he was ostracized by his local community in Co Mayo, giving way to the verb "boycott."
Boycott was a former army officer and had served in the British Army 39th Regiment, which brought him to Ireland.
After retiring from the army, Boycott worked as a land agent for Lord Erne, a major landowner in the Lough Mask area of Co Mayo who lived off the exorbitant rents he charged tenants. Evictions by Boycott were many and blo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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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ain Boycott’s Abuse of Irish Farmers Sparked the Term “Boycott”
https://www.ancient-origins.net/weird-facts/boycott-term-0020442

The English land agent who inspired the “boycott” in 19th-century Ireland
https://www.irishcentral.com/roots/history/irish-invented-boycott

 

The English land agent who inspired the "boycott" in 19th-century Ireland

Today we remember the English landowner Charles Cunningham Boycott ignored by his Mayo tenants. Charles Cunningham Boycott (March 12, 1832 – June 19, 1897) was an English land agent who became infamous after he was ignored and ostracized by his Mayo Iris

www.irishcentr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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