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의 한입 두말(일구이언) 외교에서 비롯됐다. 같은 땅을 아랍인과 시오니스트에게 약속하면서 영국의 영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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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의 한입 두말(일구이언) 외교에서 비롯됐다. 같은 땅을 아랍인과 시오니스트에게 약속하면서 영국의 영토로

by 소식쟁이2 2024. 5. 1.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의 한입 두말(일구이언) 외교에서 비롯됐다. 같은 땅을 아랍인과 시오니스트에게 약속하면서 영국의 영토로

영국의 일구이언 아닌 삼구사언 외교로부터 팔레스타인 문제는 시작되었다--심화하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의 배경에 있는 중동 정세를 잘 알 수 있다! 라고 일본의 서적 「과연 그랬구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なるほどそうだったのか!!パレスチナとイスラエル)」에서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팔레스타인의 땅을 아랍인과 시온주의자 양쪽에게 약속하면서, 자신의 것으로--영국의 한입으로 두말한 외교
시온주의자들이 국가 건설의 땅으로 정한 팔레스타인은 그렇다면 누가 지배했을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오스만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여기서 제국이라는 것은 "거대한 국가"라는 뜻이다.

이 제국은 현재의 터키(튀르키에) 이스탄불에 수도를 두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땅을 지배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이 제국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그리고 소수이지만 유대교도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다툼은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은 먼저 술탄으로 불리는 오스만제국의 지배자들을 설득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측과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 측의 전쟁이었다. 오스만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 측에 참여했다.

유대인들의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한다. 이것은 시온산의 "시온(Zion)"과 "이즘(ism)"을 합친 말이다. 이즘은 주의라는 뜻의 말이다. 주의라는 것은 이 경우에는 어떤 정치적 생각을 위한 노력이다. 시온산(예루살렘 부근의 언덕 이름)은 팔레스타인의 중심도시인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835m 정도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연합국 측의 영국은 동맹국 측의 오스만제국을 혼란시키려고 했다. 우선 오스만제국 지배하의 아랍인에게 반란을 호소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약속했다.

1915~1916년에 걸쳐 영국의 지도자 "맥마흔"과 아랍인 지도자 "후세인" 사이에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약속하는 서한(편지)이 교환했다. 이를 후세인·맥마흔 서한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이 후세인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후세인이라는 이름은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많은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은 시온주의자들의 전쟁에 대한 협력도 요구했다. 그리고 시온주의자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팔레스타인에 국가 같은 것을 만들도록 허용하겠다고 1917년 약속했다.

이는 약속한 영국 정치인의 이름(아서 벌포)을 따서 벌포 선언으로 알려졌다. 하나의 땅을 아랍인과 시온주의자 모두에게 약속한 셈이다. 영국의 일언이언 외교였다.

그러나 1916년 영국은 프랑스와도 오스만제국의 아랍인 지역을 분할하기로 약속했다. 이것을,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라고 한다. 사이크스는 이 협정의 협상에 관련된 영국인, 피코는 프랑스인의 이름이다.

이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서는 현재의 시리아와 레바논을 프랑스의 세력 범위로,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영국의 세력 범위로 정했다.

즉 같은 땅을 아랍인과 시온주의자 모두에게 약속하고 결국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만이 가능한 한입으로 두말하는 외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지배하는 지역이 됐다. 구체적으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됐다. 누구의 위임을 받았느냐 하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국제연맹이었다.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영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홀로서기까지 이 땅을 통치하는 형태가 되었다. 사실상 영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역시 시대도 20세기에 들어서자 너무나 노골적인 식민지 지배는 주저하게 되었다. 거기서 위임통치라는 명목이 사용되었다. 즉, 아랍인과 시온주의자에게 약속한 땅을, 어느 쪽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고 영국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시온주의자들은 발포 선언을 근거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을 허용하라고 계속 영국을 압박했다. 영국은 소극적이면서도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을 보내는 사업은 저조했다. 상당수 유대인은 시오니즘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유대인은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성공한 경우는 특히 그러했다. 각국의 유대인들을 모아 유대민족이라고 부르며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려는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애당초 유대인이란 누구일까. 그것은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뜻한다. 즉, 유태교도이다. 그렇다면 영국의 유태교도와 독일의 유태교도는, 같은 유태교도이기 때문에 유태인이라고 하는 같은 민족이다라고 하는 논법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다른 종교라면 이런 논란은 없다. 가령 영국 가톨릭교도와 독일 가톨릭교도는 같은 가톨릭교도라고 해서 가톨릭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영국의 가톨릭 교도와 독일의 가톨릭 교도일 뿐이다.

태국의 불교도와 한국의 불교도가 같은 불교도라고 해서 불교도인이 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유대인, 즉 유대교도들은 각국의 유대교도를 하나의 민족으로 여기는 시온주의에는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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