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고 푸틴이 생각하는 지정학상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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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고 푸틴이 생각하는 지정학상 이유

by 소식쟁이2 2022. 3. 4.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고 푸틴이 생각하는 지정학상 이유

- 그러니까 순수한 방위를 위한 행위라 하더라도 '적대적 행위'로 보게 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고집하는가? 

◆"키예프 공국"을 뿌리에 두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는 대국이다. 인구는 4500만명, 유럽에서는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어 제7위이다(제8위는 폴란드). 


면적에서는 약 60만 평방 킬로로,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럽 최대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비옥한 평원으로 전통적으로 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려왔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깊다. 9세기 후반, 키예프를 중심으로 키예프, 루시공국(혹은 대공국 혹은 키예프 공국)이라는 국가가 수립되어 13세기 몽골에게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최성기에는 유럽 최대의 판도를 자랑했다.

키예프, 루시 공국의 후신이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라고 말하고,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라고 말한다. 어쨌든, 키예프를 중심으로 상당히 큰 나라가 9세기 후반에 존재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 후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국가로는 되지 못 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 붕괴와 함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다가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1945년 유엔이 생겼을 때는 소련의 일부이면서도 벨로루스와 함께 유엔에 가입했다. 비상임이사국이 되기도 했었다.

◆ 어려운 역사가 낳은 정체성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중시했다. 비옥한 토지를 농업생산기지로 이용하거나 중공업화를 추진하였다.
뒤편에서 나오는 체르노빌 등과 관련된 내용도 이 중공업 정책의 결과 중 하나였다.

그동안 농업집단화 정책의 실패에 의해,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친 대기근으로, 300만에서 600만명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는 또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과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530만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의 비극을 다룬 영화 중 하나는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라는 영화가 있다. 전쟁 중에 실종된 이탈리아 남편을 찾아 헤매는 영화로 화면에 가득한 해바라기를 잊을 수 없는 영화였다. 그 장면은 우크라이나에서 찍은 것으로 해바라기 밑에는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소련)는 공격받았을 때에, 국토의 넓은 땅을 이용하여, 적을 깊숙히 끌어들여, 곧 반격으로 돌려 공겨사는 것을 자항하지만,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 또한 무수히 많다. 우크라이나는 그 최전방 역할을 많이 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은 이런 어려운 역사 속에서 나온다.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나 바이올리니스트 밀슈타인처럼 망명한 사람은 물론 힘들었을 테고,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처럼 국내에 머문 사람도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작곡가 프로코피에프는 망명 후 귀국한 사람이다.

◆ 독립 이후부터 계속된 러시아와의 긴장 관계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역사적 영토를 모두 현재의 영토로 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우크라이나가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곳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역사상 드문 사례이다.

하지만 소련 시절로 진행된 러시아화의 영향은 컸으며 동부에는 특히 러시아인과 친러시아파가 많다. 인구의 80%는 우크라이나인, 20%가 러시아인이지만 오랫동안 러시아에 의존한 경제였기 때문에 러시아의 세력은 20%보다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대선은 언제나 친러 대 반러(친서방)파가 팽팽히 맞서는 구도였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에 독립되었고, 이는 몇 가지 우연에 의한 것이기도 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소련에 치명적이었다.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미묘했지만 2004년에는 대선 혼란으로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 친서방인 유리셴코가 대통령이 됐다.

러시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2005년에는 천연가스 가격의 대폭 인상을 요구했다. 

◆ 러, 나토의 동방 확대에 민감한 이유

1998년경, 「소련 봉쇄」의 냉전정책으로 알려진 조지 케넌은, NATO(북대서양 조약 구)의 동방 확대에 반대였다. 러시아는 항상 주위로부터 압박받고 있다고 느끼고 그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는 나라이다. 부주의한 확대는 러시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와 위험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과거 독립국이었던 발트 3국 등은 몰라도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스는 러시아의 핵심부분이라고 러시아는 생각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독립하고 반러시아가 되었을 때 러시아는 어떻게 반응할까는 늘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부활할 때는 반드시 군사대국으로 부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러시아의 역사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2000년대 후반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폴란드에 미사일 방어시설을 배치할 계획이 있었다.

이에 러시아는 거세게 반발했다. 원래 미사일 방위는 방어용이다. 러시아가 폴란드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면 미사일 방위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순수한 방위력이라도 러시아의 공격력을 방해하는 것을 갖는 것은 적대적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 한창 진행되던 우크라이나 내 분쟁

2010년 대선에서는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가 승리했다. 그리고 유럽, 미국과 거리를 두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민 반발이 일었고 2014년 2월 키예프에서 반정부 운동이 고조되자 대통령은 사임했다.

이에 러시아는 크림에 군대를 파견해 이를 제압했다. 3월 크림의 친러계 주민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로의 합병을 요구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즉각 이 독립을 인정하고 합병을 승인했다.

또한 외국군대의 주둔 하에 우크라이나의 많은 법률을 위반하여 행해진 이 일련의 행동은 물론 위법이다. 크림뿐 아니라 동부 여러 州에서 비슷한 독립운동과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2014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포로셴코 대통령이 당선됐다. 여전히 동부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9월에는 휴전에 관한 민스크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어 2015년 2월에는 2차 민스크 합의가 이뤄졌지만 여전히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희생자만 약 1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 상당수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모든 문제

우크라이나는 국내에서도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어려운 것은 경제개혁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는 올리가르히라고 불리는 세력이 있다.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체제변혁이 일어나 자본주의화가 진행될 때 등장한 세력으로 미디어를 지배하며, 금융기관을 지배하고, 많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종종 폭력조직과도 결부된다.

금융기관의 실체를 밝히지 않으면 경제개혁이 불가능하고 이 개혁에 손을 대면 개혁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게 된다. 

우크라이나에는 체르노빌이 있다. 1986년의 원전사고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에 대한 늑장대응은 사회주의 은폐 체질 탓이라고 세계는 비판했다.

하지만  2011년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때 일본은의 대응을 보면 그것은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유럽 전체의 문제,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 모두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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