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널리 퍼진 나라들에서 왜 노예제도가 정당화되었는가?
유럽과 미국에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 기독교가 주요 신앙으로 널리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을 가진 나라들에서도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흑인 노예무역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제도는 단순한 경제활동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인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결국 종교적 분열과 미국 남북전쟁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충돌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노예무역이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왜 이렇게 오래 지속됐는지, 그리고 아프리카인 노예가 인권을 부정당하게 된 배경을 살펴본다.
◆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를 무너뜨린 기독교
고대 로마 사회는 노예제도를 그 기반의 일부로 삼아 발전하였다.
노예들은 농장 노동자부터 가정교사와 유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았고, 그들의 생활환경은 매우 가혹했다.
그러나 로마 사회의 윤리관과는 다른 기독교의 가르침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설파했다.
이 생각은 에페소(Ephesos. 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현재의 튀르키예 셀추크)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주인들, 똑같이 노예를 대하라. 그들을 위협하지 말라는 말이나 필레몬(Philemon)에게 보낸 편지의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노예 이상의, 사랑하는 형제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다.
당초 고대 로마는 기독교의 확산을 저지하고 신도들을 상대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밀라노 칙령(313년)을 거쳐 기독교가 공인되자 그 교리는 로마사회의 윤리관에 침투되었다.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이 점차 인식되는 가운데 로마사회는 기독교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아 결국 그 제도의 붕괴로 향했던 것이다.
◆ 중세 유럽에서 노예 제도의 시초
16세기 노예제도가 본격화되는 계기는 포르투갈인들이 대서양을 넘어 카리브해 지역(당시 서인도 제도)으로 진출해 설탕 생산을 확대하면서 시작된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이 지역에서 고급 식재료로서의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해 큰 이익을 얻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설탕의 재배와 수확에는 가혹한 노동이 필요했고, 현지 원주민들을 강제노동에 종사시킴으로써 이를 충당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들여온 전염병으로 인해 급격히 수를 줄여 목숨을 잃는 이들이 잇따랐다.
이간은 결과에 따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요구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내전과 부족 간 다툼이 빈발했고, 평온하게 노동력을 얻고 싶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에게 무기와 아프리카인을 교환하자고 요구한다.
무기를 갖고 싶었던 아프리카인들은 이를 양해하고 같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유럽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여기서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대서양 노예무역이 본격화됐다.
이러한 흐름은 포르투갈과 스페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다른 유럽 국가로 확산되면서 노예무역은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1652년의 영란전쟁(영국과 네덜란드에 의한 전쟁)과 1701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계승전쟁(유럽 전역의 전쟁)의 결과로 노예무역은 영국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노예무역의 이익의 대부분은 영국이 얻게 되었다.
◆ 노예제도를 긍정하기 위한 성경
이렇게 노예제도가 확대되면서 '이 제도는 비인도적이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도 보여 노예제도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사상이나 성경해석을 왜곡한 주장이 사용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의 '테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2장 9-10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노예에게는 만사에 그 주인에게 복종하여 기쁘게 하고, 반항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마음을 담은 진실을 보여 주도록 권하라. 그러면 그들은 만사에 따라 우리 구주 하나님의 가르침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은 당시 노예가 처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설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해석자는 이를 노예는 무조건 주인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이용해 노예제도 정당화에 이용했다.
또 요한복음 8장 34-35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자주 당신들에게 말해 둡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노예다. 그리고 노예는 언제까지나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언제까지나 있다."
이 말은 영적 자유를 설파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역시 노예의 자녀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노예의 신분을 물려받는 것으로 해석되는 등 노예제도 유지에 이용됐다.
이 곡해된 성경 문구들은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로 널리 사용되었고, 19세기 영국과 무역국 간에 노예무역금지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제도 옹호에 사용되었다.
◆ 영국 노예와 세례자에 의한 구금
성경을 이용해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생각이 확산되는 가운데 영국에서는 노예에게 세례를 베푸는 데 신중한 주인들이 나타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세례를 받은 노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던 데 있다.
이 우려에 대처하기 위해 영국해외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이하 SPG)는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SPG는 세례가 노예에게 영적인 구원을 주기는 하지만 세속적인 자유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들은 "노예를 해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세례를 받더라도 주인을 따를 의무가 계속된다고 설파했다.
한편 노예들에게는 현세에서 주인을 충실히 섬김으로써 다음 생에 자유와 천국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설교하면서 노예들을 주인에게 옭아매려 했던 것이다.
◆ 반강제적인 세례
이 사고방식은 미국 남부로도 확산되었다.
처음 흑인이 아메리카 대륙 남부로 끌려왔을 때 많은 기독교인 주인들은 노예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일부 주인들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곡해하고 노예들에게 가르치고 세례를 받게 했다.
물론 세례를 거부하는 노예들도 있었지만, 그 노예들도 엄격한 감시 속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16세기경의 미국에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많았고, 종교에 관계없이 노예를 거느린 주인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남북전쟁(186111865)을 계기로 폐지됐지만 이후에도 짐 크로우법(Jim Crow Laws, 남북전쟁 이후(1876~1965) 미국의 남부 11개 주에서 제정한 공공장소에서의 흑백 분리를 강제한 법안)으로 차별은 계속됐다.
짐 크로우법이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형식상의 시민권이나 투표권을 주면서도 공공시설, 교육기관, 직장 등에서 백인과 격리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차별을 합법화한 법률이다. (※유색인종 전반도 포함되어 있었다)
*짐 크로법(Jim Crow Laws)은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 분리’를 핵심으로 한 법으로, 법의 명칭인 짐 크로(Jim Crow)는 1830년대 미국 코미디 뮤지컬에서 백인 배우가 연기해 유명해진 바보 흑인 캐릭터 이름에서 따온 것이자 흑인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
이 법률에 따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오랫동안 사회적 불평등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 분열하는 종교
이렇게 해서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제도가 널리 인정되었지만 북부에서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지역별 경제구조의 차이가 있었다.
미국 남부는 사탕수수를 비롯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번성했고, 주요 노동력을 흑인 노예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편 북부에서는 상공업이 중심이었고 가족노동에 의해 경제를 지탱하는 가정이 많았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북부에서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생각이 확산되는 요인이 된 것이다.
이 지역차는 종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독일에서 루터가 교황을 비판하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종교적 대립이 심화됐다. 개신교 내부에서는 침례교파와 감리교파처럼 파벌이 더 분열됐다.
북부에서는 점차 노예제도의 폐지가 진행되었으나 남부에서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발전과 함께 제도가 강화되어 갔다.
결과적으로 남부 교파들은 성경을 노예 관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했고, 북부에서는 흑인 목사에 의한 흑인교회가 형성되는 등 종교계도 양극화되어 간 것이다.
◆ 흑인 법전과 가톨릭
노예제도가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남부에서 확산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채택했다.
그 상징인 것이 루이 14세에 의해 1685년 제정된 흑인 법전(Code Noir)이다. 이 법전은 식민지에서 노예제도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노예의 관리와 통제를 위한 지침을 제공하였다.
흑인 법전은 노예에게 로마 가톨릭 세례를 의무화하고 종교교육을 받도록 했다. 또 흑인이나 그 자손을 영속적인 노예로 취급하는 것을 합법화하고 노예끼리의 자녀나 노예와 주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도 모두 노예로 삼는 규정이 담겼다.
한편, 일요일이나 천주교 명절에 노예를 노동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노예는 어디까지나 '물건'으로 취급되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는 나날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동란기에 인권의 개념이 확대되는 가운데 1791년에는 아이티에서 노예에 의한 폭동이 발생하여 마침내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아이티 혁명)
흑인들이 인권을 빼앗긴 배경에는 종교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가르침도 그 해석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권이나 개인의 존엄성을 침해하기 위해 이용된 종교는 그 본래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역할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배우는 것은 현대사회에서의 차별과 편견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공평한 사회를 지향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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