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끌려나가고, 리커창은 억울한 은퇴 ... 시진핑 3기 시대 개막
후진타오 전 총서기가 행사장에서 경비원으로 끌려가는 한 장면은 시진핑 총서기의 집권체제가 확립됐음을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로이터)
14억 명의 중국을 지배하는 7명…, 제3기 시진핑 체제의 최고 지도진인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면면이 발표되었다. 각종 예측과 소문, 누출이 난무했지만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 일중전회(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드러난 인사는 대부분의 예측을 뒤엎는 결과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는 당 대회 시점에서 68세 이상은 은퇴, 67세 이하면 다음 당 대회까지 현역이라는 칠상팔하(七上八下)라 하는 관례가 있다. 시진핑 총서기가 이 관례를 깨고 연임할 것이 이미 확실시됐지만, 아직 67세인 리커창 총리가 은퇴로 내몰린 것은 놀랄 일이다.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등 실권이 적은 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또 실무파 관료의 거물로 알려진 왕양 정협(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도 67세의 나이로 은퇴했고, 차기 총리의 최대 주자로 꼽혀온 후춘화 부총리는 상무위원에 들기는 커녕 그 아래 등급인 정치국 위원에도 들지 못했다.
리커창, 왕양, 후진타오 전 총서기와 관계가 깊은 이른바 공청단(団派.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경력을 가진 정치그룹)로 꼽힌다. 단파를 폐하고 시진핑 총서기와 관계가 깊은 인물을 끌어올린 것이 이번 인사의 특징이다.
전당대회 마지막 날에는 후진타오 전 총서기가 행사장에서 경비원으로 끌려나간 단막도 있었다. 중국 관영 통신사 신화사의 영문판이 트위터를 통해 전한 바에 의하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공청단(団派) 궤멸의 인사와 합치면 불온한 냄새를 느끼지 않는 편이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끌려 나가는 후진타오의 사진은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 시진핑은 언제부터 황제로?
시진핑 압승 인사에 따라 시진핑의 권력이 반석에 드디어 황제가 됐다고 운운하는 식으로 보도되지 않을까 예측하는데 이런 헤드라인은 이렇게 듣고 싶어진다.
"어? 지금까지는 반석이 아니었나?"
"황제가 됐어? 지금까지는 아니었어?"
돌이켜보면 2015년 현재 황제로 가는 길은 이미 보였다. 시진핑이 3기 이후에도 연임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시진핑의 각종 정책, 특히 고위층까지 적발한 반부패 운동의 철저함에서 도출한 예측이다. 결과적으로 옳았지만 장담해도 괜찮을까라는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진핑의 권력기반이 확립되면서 장기집권으로 가는 길이 거의 틀리지 않았는가. 그렇게 안팎에 알린 것이 2018년 헌법 개정이다.
국가주석은 2기 10년까지의 규정을 철폐한 것이 결정적 이었다. 이후에도 과거 마오쩌둥과 덩샤오핑밖에 이루지 못했던 역사결의를 결정하는 등 시진핑은 그 권력기반강화에 매진해 나간다.
2015년 시점에서도 상당히 명백해, 2018년 시점에는 이미 반황제였던 시진핑이 더욱 반석에 올랐고, 더 강력해진 2022년이라는 것인데, 지금까지의 권력 강화를 너무 많이 쌓으면 더 이상 오버스펙이라기보다는 지나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세상에는 '어느새 성공 자체가 인간을 지배, 탈취하러 온다'는 명언이 있는데 지금의 시진핑 위원장은 바로 이 말 그대로의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 집권 체제의 확립에는 성공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흔히 성공한 독재정권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히지만 그 큰 요인은 총수를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규칙과 정년의 관례를 확립한 데 있다. 마오쩌둥의 독재 반성부터 수장이 과도한 권력을 갖게 하는 것, 개인숭배의 위험성을 감안한 규정이다.
권력투쟁도 이 룰의 틀 안에서 이뤄짐으로써 쿠데타를 포함한 돌발 정변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수장은 은퇴 후의 보복을 두려워하면, 그다지 무사할 수 없다고 여겨져 왔다.
이번 인사는 그야말로 성공한 일당 독재정권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시진핑의 승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과연 중국의, 그리고 시진핑 체제의 안정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는다.
지나치게 쌓은 성공이 가져올 또 다른 불안은 수뇌진의 능력이다.
2012년 시작된 시진핑 정권은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고위급 인사들도 타깃으로 한 반부패 운동으로 시진핑 총서기는 절대적인 서민 인기를 얻었다. 이 반(反)부패 운동은 느슨한 포즈만이 아니다. 중국 현지 경영자에게 이야기를 듣자 말단 관리들로부터 뇌물을 받을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등 일반 시민의 생활에 가까운 수준까지 반부패 운동의 혜택이 있었다고 한다.
또, 언론통제나 인터넷 검열의 강화, 인권파 변호사나 인터넷의 오피니언 리더의 탄압이라고 하는 인터넷 여론통제는 해외로부터의 평판은 나쁘지만, 사회불안이나 공산당 비판을 줄어들어, 중국 공산당 내부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얻는 점이다. 소셜미디어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이른바 아랍의 봄이 시작된 것은 2010년이다. 시진핑 정권 출범 당시에는 인터넷과 사회 불안에 대한 경각심은 극히 높았지만 완전히 제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나 홍콩에 대해서도 해외에서의 평판은 최악이면서도 중국 공산당의 시각에서는 안정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경제에서도 차이나 쇼크 등의 과제는 있었지만 안정성장을 실현했으며, 또 혁신 분야에서는 지난 10년간 크게 비약한 것도 틀림없다.
그럼 만점 평점이 좋냐면 그렇지 않다. 미-중 관계 악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는 중국의 미래 성장도 위협하는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에 대한 제로 코로나 대책은 올 들어 파탄상태에 있으며, 소비둔화로 이어지고 있다. 또 오랜 시한폭탄으로 여겨져 온 부동산 문제도 지난 20년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이다.
시진핑의 2010년, 그 마지막 몇 년간 악재는 집중돼 있다. 향후 5년, 10년을 내다보면 여기에 고령화 문제도 더해진다. 중국의 인구는 올해 순감소로 돌아설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한 자녀 정책의 완화, 철폐를 계속해도 코로나19 사태는 그 이상의 충격으로 출산율을 끌어내리고 있어 발등의 상황은 극히 어렵다.
● 재능보다 인연 중시 불안
중국 공산당의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 7명. 그 국정운영 능력에는 불안도 느껴진다(신화사/아프로)
경제운영을 직접 지휘하는 중책을 담당하는 것이 총리다.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부터 행정과 경제운영 실무를 맡아 왔다. 또 수장이 의견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로서 정치를 안정화시키는 균형자라는 중요한 역할도 있다. 시진핑 체제 이후 총서기에 대한 권한 집중이 진행됐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이 구도는 바뀌지 않는다. 지난 1년만 해도 부동산 위기와 경제둔화 대책을 지휘하는 사람은 리커창 총리다.
내년 3월 리커창을 대신해 총리에 취임하는 것이 리강(李強)이다. 저장성 지방정부에서 경력을 쌓아온 사람이다. 시진핑이 저장성 1위 시절 지기를 얻었고 이후 로켓 출세를 이어갔다.
저장성, 장쑤성, 상하이시와 지방정부 수장을 거쳤지만 중앙정부에서의 이력은 없다. 역대 총리는 부총리로 경력을 쌓아왔다. 거대한 관료기구인 국무원을 꾸려나가는 데는 충분한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리강은 처음으로 부총리 경력도, 심지어 중앙부처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총리직을 맡게 된다.
최근 총리 경험자를 되돌아 보면, 주룽지, 원자바오, 리커창과, 역대 총리는 모두 경제와 실무에 강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였다. 지방정부 때리기의 리강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이번 인사에서 낙마한 리커창, 왕양, 후춘화는 모두 총리 후보로 거론됐지만 모두 숙달된 테크노크라트이자 총리용이라는 인물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혀온 후춘화는 16세에 베이징대에 입학해 젊은 시절부터 재주를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반면 리강은 닝보지구 농학원 출신으로 시진핑과 만나기 전까지는 뚜렷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대칭적이다.
총리용 능력을 가진 인물이 계속 공청단(団派)였던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은 테크노크라트를 발견해 선발하고 단련하는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단파에는 실력파 관료가 갖추어져 있다. 이런 인재들을 축출한 뒤 국정을 돌릴 수 있을까.
또 시진핑 총서기의 경제 브레인이라고 하는 것이 류학 부총리다. 경제황제라는 별명을 얻으며 지난 20년간 경제정책의 일선에서 활약해온 인물이다. 류학 부총리를 대신해 이 자리에 오르는 것이 허리펑(何立峰) 발전위원회 주임이다. 푸젠성 지방 관료였지만 당시 시진핑의 부하가 된 것이 인연이 돼 2014년부터 발전개혁위원회 경력을 쌓고 있다.
허리펑(何立峰)은 경제학 박사(취득 천저우시 시장 시절)를 갖고 있고 발전개혁위원회 경력도 이미 8년을 헤아린다지만 젊은 날보다 경제학자로서 높은 성망을 얻었던 류학의 빛나는 경력과 비교할 수 없다.
중국은 과거 30년간 꾸준히 성장해 왔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경제 외교 혹은 감염병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그럭저럭 헤쳐나왔지만 주룽지, 오이, 왕치산 같은 실무파 관료들이 최전선에 섰다.
과거 10년의 시진핑 체제와 비교해도, 다음 10년은 훨씬 난이도 높은 국정 운영이 요구되게 된다…… 하지만, 재능이 아니라, 애송이를 우선한 체제로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이번 인사에서 후계자가 뽑히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시진핑 위원장은 최소 4선, 2032년까지는 정상 자리를 내주지 않을 속셈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기 정권이 계속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안정된 통치, 경제, 외교가 전제다. 시진핑과 정책면에서 맞설 실무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빠지게 된 결과, 앞으로 중국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는 차와 같다. 제로 코로나, 경제정책, 대만 문제 등 어려운 문제가 가로막힌 향후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시진핑의 권력은 극히 반석이었다. 그렇다고 중국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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