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의 삶, 그리고 그가 결코 이해하지 못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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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헨리 키신저의 삶, 그리고 그가 결코 이해하지 못한 것들

by 소식쟁이2 2023. 12. 9.

헨리 키신저의 삶, 그리고 그가 결코 이해하지 못한 것들

그가 보낸 생애는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처럼 중요한 결과를 사회에 가져왔다. 헨리 키신저는 독일의 작은 마을 푸르트에 있는 소규모 게토(강제 거주구)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는 나치에게 살해당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본인과 부모, 남동생은 1938년 후반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독일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의 일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많은 피난민들과 마찬가지로 그이 일가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가냘픈 몸매였던 15세 헨리 소년은 영어를 한마디 못하고 장래에 대한 기대도 거의 갖지 못했다. 맨해튼공립고등학교에 다녔고 밤에는 일해서 가계를 도왔다. 동시에 회계사가 되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뉴욕에 사는 유대인 이민자로서의 무리 없는 목표였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키신저의 운명도 급변시켰다. 그는 육군에 입대하였고, 유대교 정통파 신앙이 뿌리내린 가정을 처음 떠나 미 점령군의 일원으로 다시 독일 땅을 밟았다. 그때부터가 그에게 진정한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이후 코스모폴리탄의 현인 지위를 확립하는 그는 평생 권력을 추구한다. 나아가 미국과 세계의 명운도 결정짓는 셈이다. 두고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의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당시 미국 지도자들이 강하게 요구했던 것은 독일 사회를 잘 알면서도 미국에 대한 애착도 갖고 있는 우수한 젊은이들이었다. 키신저는 이 조건에 훌륭하게 부합했다. 외형이나 분위기야말로 독일인적이지만(그것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유대인으로서의 그 성장은 그가 결코 나치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인들의 신뢰를 얻은 그는 전후에도 1년간 육군에 남아 미국의 영향 아래 새로운 독일을 만들기 위해 일했다. 그것은 유럽 전후 질서의 토대가 되었다.

육군의 추천서와 복원군인원호법 덕분에 키신저는 하버드대에 입학할 기회를 얻었다. 다른 학생보다 나이 많은 학부생이 됐지만 전쟁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난민 경험이 있는 유대인이고 부유하지도 않은 등 그는 대학교육을 받는 데 불리한 조건을 여러 개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에서 키신저 는 유럽에서 이주한 신세대 학생, 학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데 협력할 결의를 다지고 새로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한 문명 파괴를 저지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체제란 소련을 가리킨다.

키신저에게 평생 사명이 된 것은 다음과 같다.
힘을 행사해, 미국(과 자기 자신)을 나락의 바닥에 대한 방벽, 혹은 빛이 되는 지위로 끌어올린다. 이 빛이란 자신이 보는 곳의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을 비추는 존재나 다름없다. 인류에 대한 위협에 대한 비관론으로 그는 미국이 우위에 서는 상황을 갈망하게 됐다. 핵무기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유난히 그랬다. 미국이 힘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재앙을 발생을 막는 것이다. 국무부 외교국이야말로 소속되지 않았지만 키신저는 외교와 군사가 교차하는 영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후의 상황을 오랫동안 좌우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 대학 교수를 거친 뒤 키신저는 순식간에 권력의 핵심으로 뛰어올라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명이 역대 대통령과 재계 지도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쉬지 않고 일하며 이 사명을 추구했다. 전쟁과 외교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미국 주도의 서방국가 동맹 강화에 힘썼다. 유럽에서의 이 동맹 아래 각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군사,경제, 외교상 협력관계를 키웠다.

닉슨 행정부와 포드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중국과 중동을 비롯한 다른 많은 지역으로 자신의 정책 대상을 확대했다. 그가 길을 터주는 형태로 미국과 공산 중국은 처음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분명해졌다. 당시 소련과 아시아 지역과의 관계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인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1973년 전쟁 이후 키신저의 주선으로 미국은 중동의 중요한 외부 세력이 됐다. 이스라엘, 이집트 등 미국 정부와 연계하는 한편 소련 정부를 제껴버릴 의향을 가진 국가들에 대해서는 미국이 최대 규모의 원조와 군사지원을 제공했다.

키신저는 항상 한 명의 난민이었고, 대규모 잔학 행위를 피해 미국에 왔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국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게 되었다. 과거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이상주의적 충동은 단순하고 위험하다고 거절했다. 증오와 폭력은 사회에 대한 그의 시각에 늘 그림자를 드리웠다.

키신저는 미국의 힘을 더 나은 선택지, 그나마 나은 쪽의 선택지로 삼고 싶어 했다. 인류의 최선의 부분을 구제하면서 인간의 약점과 결점에서 비롯된 피해를 제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논법이 그를 어두운 곳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그런 식으로 그는 베트남전 때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의 격렬한 폭격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 폭격으로 무고한 사람들도 죽었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본인이 간주하는 바의 현격한 대규모 고난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산주의 전제국가에는 그런 고난이 따라다닌다고 한다.

비슷한 설명은 미국이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의 억압적 체제를 지지했을 때도 이뤄졌다. 그는 이란, 이집트, 한국, 인도네시아, 파키스탄의 독재정권을 외교적으로 편드는 데도 그런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들 독재정권이 가져올 것은 안정이지 사회혼란이나 대립이 아니라는 게 그 주장이었다. 이들 나라들의 사회는 아직 민주제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기반으로 하는 가치 있는 사명은 선을 넘었고 베트남, 중남미, 이란에서는 그야말로 자신이 저지하려는 부류의 악몽이 야기됐다. 과도한 미국의 힘과 과도한 지원으로 반공을 내세우는 독재자 편을 든 것이 그 자체로 인한 재앙을 초래했다.

이러한 각 사회에서 일어난 죽음과 파괴, 고난이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을 증명한다. 미국 내 키신저의 정책에 대한 강한 항의와 사망 때까지 터져나온 본인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미국의 힘을 둘러싼 그의 확고한 진심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명시한다. 그러한 힘은 본래 사람들에게 기여할 것이었다.

키신저의 생애란 그 때문에, 진보를 이야기하는 우화인 동시에 오만이 가져오는 비극이기도 했다. 그는 자부심을 갖고 아메리칸 드림을 살았다. 자신과 같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선을 받아들이고 힘에 집착하며 그로 인해 잘못된 전망을 봤다. 그 지성을 총동원해도 그는 미국의 힘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좋든 나쁘든 키신저의 생애는 지난 세기 미국의 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 죽음은 미국이 가진 힘이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 이 내용은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 역사학과 교수의 제레미 수리 교수의 개인적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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