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안문(天安門) 사건으로부터 35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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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중국 천안문(天安門) 사건으로부터 35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 뭐야??

by 소식쟁이2 2024. 6. 12.

중국 천안문(天安門) 사건으로부터 35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 뭐야??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 톈안먼 광장을 메운 학생들. 이후 군에 의한 탄압이 시작되어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천안문(天安門) 또는 톈안먼으로 혼용하며 기재함


학생과 시민이 민주화 요구
2024년 6월 4일 중국 톈안먼 사태 이후 35년이 지났습니다. 대만과 일본에서는 추모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사건이 금기시되어 보도되는 경우란 없고,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도 없습니다.

홍콩에서는 2019년까지 매년 추모 집회가 열렸지만 중국의 압박이 강해져 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2024년 5월에는 톈안먼 사건을 추모하는 SNS 게시물이 법에 저촉된다며 8명이 홍콩 경찰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 정부가 과민 반응하는 천안문 사건은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그리고 사건은 지금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공산당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던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최고지도자가 되어 경제자유화 등 개혁개방노선을 취했습니다.

당시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의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시대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동유럽 나라의 경제적 교착상태가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개혁이 필요해졌습니다.

동구권의 맹주인 소련에서는, 1985년에 최고 권력자인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민주화나 정보공개를 진행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러한 영향으로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해져 갔습니다.

중국 정권 내에서도 민주화에 이해를 나타내는 개혁파가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의 수장인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는 개혁파였습니다. 그러나 후 총서기의 개혁은 공산당 일당 지배를 뒤흔드는 것이라는 보수파의 반발로 1987년 총서기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후는 1989년 4월에 병사했습니다. 후를 평가하는 학생과 시민들은 후를 추모하기 위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였습니다. 모이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점차 추모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모임이 되었습니다.

당시 수장은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로 후와 같은 개혁파였습니다. 조 총서기는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요구에 이해를 표시했지만, 실세 덩샤오핑과 리펑(李鵬) 총리 등은 학생과 시민의 행동을 '동란(動乱)'으로 보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5월 19일 새벽 그는 톈안먼 광장 학생들 앞에 나타나 핸드 마이크를 들고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다」라고 말한 뒤, 학생들에게 퇴거하도록 요구했습니다.이를 끝으로 조 총서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실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20일에는 베이징 시에 긴급사태를 선언하는 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다만 천안문(天安門) 광장의 학생들이 퇴거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항의를 표시하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 단식농성을 하는가 하면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 100만 명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면서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친 사건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중국 정부는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탱크와 장갑차가 천안문 광장에 돌입하여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발포했습니다. 학생들의 행동은 이것으로 진압되었지만, 많은 학생들이 사상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발표로는 사망자가 319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1천~3천명이라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민주화 움직임은 이것으로 멈추었습니다. 한편 그 반년 후 유럽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진영이었던 동독이 붕괴되었습니다. 다른 많은 동구권 나라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지며 민주화로 향했습니다.

소련도 1991년에는 붕괴해 러시아 등 여러 나라로 나뉘어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자유화로 향했습니다. 동서냉전이 끝난 것입니다.

다만 동구권 나라에서 체제가 크게 변하지 않은 나라도 있었습니다. 북한이랑 쿠바랑 중국입니다.
중국의 정치체제는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경제는 시장경제의 구조를 도입해 발전시켰습니다. 경제발전이 민주화 요구를 빗겨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톈안먼 사태에 대해 '인권탄압'이라며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행하는 나라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본은 중국에 자금을 공여하는 정부의 개발도상국 원조(ODA)를 동결하는 정도의 달콤한 제재였습니다. 중국의 거대한 시장이 매력적이었던 것이나 중일전쟁으로 큰 피해를 준 것에 대한 속죄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 등의 경제제재도 조만간 해제되고 중국은 경제성장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해 세계 각국과의 교역량은 크게 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가 되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경제대국이 된 중국이지만 정치민주화는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기 10년까지로 정해져 있던 국가주석 임기를 자진철회하고 3선에 접어들었습니다. 비판적인 세력을 탄압하거나 정보통제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또한 무역이나 영토·영해등의 문제로 여러 나라와 갈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톈안먼 사태는 지금 중국의 위상을 결정한 분수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요구된 민주화를 정부가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고 평온하게 ㅅ습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중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의 큰 영향력을 생각하면 세계 또한 달랐을 것입니다. 천안문 사건은 지금 세계의 모습과도 연결되는 역사적인 대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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