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뭘 잘못했나'… 너무 허술한 대통령의 자작극 계획, 현대사 속 쿠네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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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윤석열 대통령은 '뭘 잘못했나'… 너무 허술한 대통령의 자작극 계획, 현대사 속 쿠네타 연혁

by 소식쟁이2 2024. 12. 14.

윤석열 대통령은 '뭘 잘못했나'… 너무 허술한 대통령의 자작극 계획, 현대사 속 쿠네타 연혁

이 내용은 비상계엄에 대한 newsweek의 분석자료이다.

"심야 계엄령 차단은 독재정치를 거쳐 쟁취한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
설마, 설마 하룻밤 사이었다. 분명 야당 의원인 김민석은 올 여름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내릴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누구나 역시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물론 그 무렵부터 우파이자 소수 여당인 윤 정권이 강권적 성향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의 지지율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락했고 대통령 부부의 비리의혹도 깊어졌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자유주의 정치인과 언론인의 사무실과 자택을 샅샅이 뒤지게 했고, 변변한 근거도 없이 야당 지도자 이재명을 형사고발했다. 과거의 유물 같은 군사 퍼레이드도 해 보였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앞세우고 자작극 쿠데타를 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현직 대통령이 독재자로 변신한다는 김민석의 주장은 너무 황당해 보였다.

김 의원은 1987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그래도 당파적 색깔을 드러낸 발언이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북한과의 군사 충돌로 전시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계엄령을 내릴 수 있다는 법은 남아 있었다.
그 계엄령이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12월 3일 오후 10시 23분 윤 대통령은 느닷없이 예고 없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6분간 성명을 읽고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유는 자유주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정권의 관리들에 대해 22건이나 되는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내년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국회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는 괴물로 바꿔 놓았다는 것이었다.

윤 대통령은 정적을 친북 반국가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것은 한국의 과거 독재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것과 같은 표현이었다.
1시간 뒤에는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계엄사령부는 국회와 지방의회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며 시민들의 집회를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수도 서울 시내에는 장갑차와 헬리콥터가 출현했다.

◆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의사당 진입을 시도하는 병사들을 항의하는 시민들이 막았다"

계엄 선포를 알리는 국내 뉴스진행자들은 보기만 해도 몸을 떨었다. 대다수 국민처럼 계엄령 하의 나날을 체험하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것은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가 살해됐을 때다. 이후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계엄령은 1981년 1월까지 유지되었다. 그 사이 광주에서 계엄군 공정부대가 최소 수백 혹은 수천 명의 시위대를 학살했다.

이 광주 사건은 현대 한국사의 한 고비가 됐다. 당시 일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2024년인 지금, 국민 대다수는 그 학살도 역사상의 사건, 비극이지만 옛날 이야기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들 장갑차와 헬기가 국회를 포위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국회에는 다수결로 계엄령을 해제할 권한이 있었다.

다행히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이유 중 하나는 매번 윤 대통령의 행동이 어릿광대이면서도 졸속이고 무능했다는 데 있다. 보통 쿠데타로 권력 탈취를 노리는 인간은 면밀한 대본을 준비해놓기 마련이다. TV방송국을 탈취하고, 인터넷 접속을 막고, 야당 지도자를 체포해, 검문소를 마련한다--.

이번에도 그런 계획은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미디어의 통제는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갔다. 12월 3일의 심야에도 텔레비전의 취재반은 국회 의사당 주변에서 자유롭게 취재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지도자(민주당 의원들)들은 SNS로 대통령에 대한 항의를 계속했다. 주요 야당 지도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은 나온 것 같지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다 보니 도망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무력행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무장 시위대에 떠밀려 갔다(이 자료는 계엄 선포 약 24시간 후에 썼기 때문에 그 후에도 일어났을 「설마」의 사태에 대해서는 양해해 구하고 있다).

아무튼 윤 대통령의 행동은 너무 허술했다. 비밀리에 일을 진행시키면서도 핵심 인물은 포섭해 두는 균형 감각이 부족했다. 계엄 선포를 건의한 것은 김용현 국방장관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명령에 따른 군인은 극소수다.

병사나 장교의 대부분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권 국민의힘 중진들도 아무 것도 알고 못한 듯 대표 한동훈은 곧바로 쿠데타 비난 성명을 냈다.
하지만 자칫하면 대혼란과 피바다가 될 수도 있었다. 법률상 국회는 다수결로 계엄령을 해제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의원들이 모여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나 초법적인 계엄령 발동으로 국회는 폐쇄되고, 무장한 병사들이 의사당 밖을 순찰했으며 기관총을 갖춘 헬기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래도 국회의원들은 해냈다. 의사당 주변에 모인 시민들은 배치된 특수부대와 몸싸움을 벌이고 병사와 장갑차를 막아 의원들이 건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더불어민주당 여성 정치인은 무장한 병사를 맨손으로 밀치고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당 대표인 이재명은 59세의 나이에 놀라운 운동능력을 보였고 병사들을 피하기 위해 의사당 벽을 넘었다. 다행히 아무도 그에게 발포하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선 의원과 보좌진들은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오전 0시 49분 국회 개회가 선언됐다. 우원식 의장은 모든 법적절차를 밟아 투표 결과에 의문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그 사이에도 공정부대가 유리창을 깨고 침입을 시도했지만, 의회 직원이 소화기나 휴대전화의 플래시로 대응해, 어떻게든 억제했다.
국회 절차에 따라 법안을 타이핑하고 제출하는 데 12분이 걸렸다. 그러나 오전 1시 1분 300명의 국회의원 중 가까스로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190명이 만장일치로 계엄령 해제를 결의했다.

이 중에는 여당·국민의힘에 속하는 의원 18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헬리콥터와 장갑차, 그리고 병사들은 의사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국회 결의에 따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의원들은 회의장에 머물면서 윤 대통령이 다시 군을 출동시키거나 새로운 계엄령을 선포하는 사태에 대비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굴욕을 당한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계엄령 해제를 발표한 것은 오전 4시 27분이었다.

◆ 보수세력엔 망신의 덧칠
"12월 5일 국회 앞에는 야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이 모여 대통령직 사퇴를 촉구했다"

현시점에서는 상황이 아직 유동적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2027년까지 임기를 수행할 가능성은 낮다. 야당은 즉각 사퇴를 촉구했으나 응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탄핵 절차에 들어갔다.

탄핵에는 의회(정원 300명)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여당 의원은 108명으로 3분의 1을 조금 넘는다. 표면상 여당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18명의 의원이 이미 계엄령 해제에 찬성표를 던졌다. 탄핵 결의에서도 8명 이상의 동조자가 나올 가능성은 높다.

윤 대통령이 불명예스러운 탄핵보다 사퇴를 택하더라도 아마 기소를 면할 수 없다. 한국에는 과거 3대 대통령 중 보수 성향의 이명박과 박근혜를 기소하고 투옥한 역사가 있다.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쉽게 꺽이지 않는다. 40여 년 만의 계엄령은 단 6시간 만에 의회 투표로 해제됐다. 한 발의 총알,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총알 한 방이라도 맞았다면 흐름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항의 민중은 민주주의의 규범을 따르고 있었고 군대에 포위된 의원들도 숙연하게 투표했다. 이게 민주주의다. 병사들도 그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한국 보수세력에겐 수치의 덧칠이 됐다. 자신들이 짊어진 박 대통령을 탄핵 재판에서 잃은 것이 2017년이다. 집값 급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정권을 탈환한 것이 2022년이다. 거기에 이번 자작극 쿠데타 미수다.

이 나라의 보수세력은 어차피 군부독재 시대의 후예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감추고 있던 전제의 송곳니를 드러낸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항변할 수 없을 것이다.

슬픈가, 보수파 중에서도 나름대로 분별 있는 의원들은 또다시 자신들이 짊어진 대통령을 탄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사 속 계엄령과 쿠데타
북한과는 휴전상태의 긴장관계가 계속되는 대한민국에서는 건국 직후부터 독재자들이 계속해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하며, 공산주의 척결을 명목으로 반대파 시민과 학생을 탄압하기도 했다.

1948년  한국 정부 수립 후 불과 2개월 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공산주의자 진압을 위해 처음으로 계엄령을 포고했다. 탄압으로 수천명의 국민이 죽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인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이승만이 간헐적으로 계엄령을 시행했다.

 

1960년  반정부 시위의 고조에 이승만이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참가자와 경찰과의 충돌로 수백 명이 사망했고, 이승만은 사임의 요구에 직면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에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했다.

 

1972년  박정희가 새로운 쿠데타를 실행해 계엄령을 발령, 서울의 거리에 전차를 배치했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되고, 육군소장의 전두환이 쿠데타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후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 체제가 87년 민주화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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