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80년후 유죄 왜? 1만505명 살해 방조한 당시 18세 독일 여자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서 속기사를 맡아, 1만명 이상의 살해에 관여했다고 해서 소추된 여자(99세)의 유죄가 8월에 확정되었다. 수용소 간부나 교도관이 아닌 사무원에 대한 소송으로는 첫 사례로, 「마지막 나치 재판」으로서 독일에서 주목을 받았다. 80여 년 전 일어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량학살)라는 초유의 범죄에 왜 이제 심판이 내려진 것일까. 당시 18~19세였던 여자 생애의 절반과 독일의 나치 범죄 추궁 역사는 많이 요동쳐 왔다.
[사진] 일룸가르트 후르히너 피고 / 독일연방사법법원에 의한 풀히너 피고에 대한 항소심판결을 기다리는 방청자들 = 2024년 8월 20일, 독동부 라이프치히
◆ 성실하고 우수한 직원
2024년 8월 20일, 독일 동부 라이프치히의 재판소는, 현란한 샹들리에가 비추는 중후한 법정에서, 독일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 연지색 법복을 입은 연방사법법원(최종심)의 가브리엘레 칠레너 재판장은 방청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1만505명의 살인과 5명의 살인미수를 방조한 피고인에 대한 집행유예 2년의 소년형(少年刑. 금고형) 유죄 판결은 확정했다
유죄가 확정된 것은, 이르무가르트 후르히너 피고(99세).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당시 단치히) 근교의 슈투트호프 강제수용소에서 1943년 6월~1945년 4월 유일한 속기 타이피스트(속기사)를 맡았다. 수용된 유대인들의 가스실 살해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송을 도운 것으로 단정됐다.
재판 기록이나 현지 언론에 따르면, 후르히너 피고는 1925년 5월, 그단스크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60킬로에 있는 카르트호프라고 하는, 당시 인구 수백명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지 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이웃 마을 은행에서 속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인사에서는 매우 성실하고 정확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우수한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91세로 사직(당국)의 손이
나치 독일은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해 그단스크 일대를 지배했다. 전선이 넓어진 1943년 4월 나치 동원 강화의 일환으로 흐루히너의 은행은 폐쇄됐다. 피고는 그해 6월부터 슈투트호프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어, 1945년 4월에 소련군에 쫓겨 철수할 때까지의 약 2년간, 소장과 부관 전속의 속기사로서 종사했다. 구술된 지시나, 외부로의 연락사항을 문자로 타이핑을 계속 했다.
전후에는 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州에서 생활했다. 40년대 후반 무렵에는 전 소장을 포함한 수용소 간부들이 종종 찾아왔다. 1954년, 같은 수용소에서 일하고 있던 전 나치 친위대 조장과 결혼해, 다음 해에 아들을 출산. 「전업주부에 전념한다」며, 근무하고 있던 주립 병원을 퇴직했다.
병원 취업 때 원래 근무처를 '국방군'이라고 속였지만 수용소에서 일한 사실을 마냥 숨긴 것은 아니었다. 소추된 전 소장에 대한 공판에서 1954년에 증인을 맡은 것 외에 1960~80년대에도 증언에 섰다.
전후에 범죄 경력이 없었던 후르히너 피고에게, 사정(당국)의 손이 뻗친 것은 2017년 2월이다. 살인방조의 혐의로, 살고 있던 고령자 시설이 가택수색을 받았다. 이때 91세로서, 나치 전범으로서, 돌연 독일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금고 3년 미만은 불문(不問)에 붙이기도
왜 입건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나치 범죄와 마주한 독일의 전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치 정권이나 친위대 구성원에 대한 범죄 추궁은 전후 바로 시작됐다. 1945년에 나치당 2인자였던 괴링 등 고위관료 22명을 재판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 재판이 개정되었다. 전후해 독일을 분할 통치한 미·영·불·러도 소추를 계속했다. 그 후는 동서독이 계승해, 5198년에는 검찰 조직 「나치범죄 추궁센터」가 설립되었다. 이 센터는 지금도 나치범죄 수사의 사령탑으로 역할을 하며, 후르히너 피고도 기소로 이끌었다.
그러나 전후 한동안 독일은 현재만큼 추궁에 열심이 아니었다. 점령국에 죄를 떠넘기고 있다는 반발은 국민에게 뿌리 깊었다. 서독에서는 점차 나치 당원들의 사회복귀가 진행돼 나치정권의 명령으로 이뤄진 금고 3년 미만의 범죄는 불문(不問)에 부쳐졌다. 한편, 외교 측면에서 다른 나라로부터의 신뢰 회복을 위해, 과거 나치에 대해 회개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도 있었다. 독일은 나치의 어두운 과거에 대한 거부과 반성 사이에서 요동쳐 왔다.
◆ 19년의 논쟁 끝에 (범죄)시효 철폐
흔들리는 독일의 상징이 나치 정권에 의한 살인의 시효를 둘러싼 시효 논쟁이다. 서독에서는 원래 계획적인 살인을 벌하는 모살죄에는 20년의 시효가 있었다. 일부 범죄의 시효 성립이 임박한 1960년 국회에서는 시효 철폐 논쟁이 벌어졌다. 「나치의 과거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가 질문이었다.
시효 폐지를 호소하는 좌파세력에 대해, 보수정당들은 법률의 안정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나치의 과거를 빨리 떨쳐버리고 싶은 여론이 있어 논쟁이 좀처럼 마무리되지 못했다. 국회는 전후 직후의 시효 기산일을 1945년에서 1949년 말로 미루거나 시효를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해 결론을 미뤘다.
시효 철폐가 결정된 것은 논란이 시작된 지 19년 만인 1979년이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미국 TV 드라마가 독일 내에서 방영돼 반나치 감정이 고조된 것과, 나치와 직접 연결되지 않은 세대에 의한 학생운동이 활발해진 것이 배경에 있다. 그런데도 철폐 법안의 국회 통과에서는, 찬성의 255표에 대해 반대가 222표로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 공판 첫날 택시로 도망
홀로코스트의 역사 연구가 진행된 것도 범죄 추궁에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 등 일부 카리스마적 권력자들만의 악행이 아니라 업무수행 능력이 뛰어난 관리들의 존재 없이는 대량학살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법원 판례의 변화도 있었다. 수용소 간수에 대한 재판에서 범죄행위와 직접 연관되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살인을 실행하는 조직의 일원이라고 입증하면 충분하다는 획기적인 판결이 2011년 나왔다. 이 판결이 「모든 수용소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검토하다」(나치범죄 추궁센터)이 되어, 이윽고 후르히너 피고가 부상했다.
2021년 9월에 시작된 후르히너 피고의 공판은 파란의 개막이었다. 피고는 출정 첫날, 살고 있던 고령자 시설에서, 택시로 도망을 가려했다. 그날 발견되어 잠시 구류되었다.
◆ '그곳에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해
그의 공판에서는 미국,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사는 슈투트호프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비디오 링크로 차례차례 증언에 섰다. 대부분은 당시 10대로 열악한 생활과 가혹한 노동, 비인도적 취급, 친족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쟁점 중 하나는 수용소에서의 대량살인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여부이다. 후르히너 피고를 아는 증인은 없고, 본인은 묵비권을 계속 행사했다. 판사는 피고의 집무환경을 확인하기 위해 수용소 부지에 이례적으로 현지 방문을 했다.
변호인은 「증거로부터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었다」라고 무죄를 주장했다. 2022년 12월의 최종 심리의 날, 판사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 후르히너 피고는 침묵을 깼다.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미안하고, 그때 바로 슈투트호프에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
흐루히너 피고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선고된 독일연방행정법원이다.
◆ 사무원의 행위야말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같은 달, 지방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렸다. 피고는 상층에 있던 집무실에서의 전망이나 일상적인 부지의 왕래를 통해서 「화장장의 굴뚝으로부터 매일 도착하는, 인간 시체의 탄 냄새를 알고 있었다」라고 인정한 것이다. 속기 등의 업무를 통해 살인행위를 알면서도 열심히 직무를 수행해 주범들을 심리적으로 뒷받침했다고 결론지었다.
항소심에서도 유죄는 번복되지 않았다. 연방 사법법원의 치레너 재판장은 판결로, 전후도 전 소장등과 교류가 계속 된 것 등에서, 「(피고는) 신뢰로 연결된 내부에 속해 살해를 포함한 모든 결정이 행해진 진짜 중추에 있었다」라고 지적하였다. 관료제에 기반을 둔 국가적 살인시스템에서 주범의 신뢰를 받고 있는 유일한 사무원에 의한 이 행위야말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역사적인 항소심 판결에 흐루히너 피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입회한 사람은 판사를 비롯한 법조인과 언론 학생들, 나치를 직접 알지 못하는 세대들뿐이었다. 역사는 뒤에 남겨진 자에 의해 쓰여짐을 상징하는 광경이었다.
◆ '소추대상' 다시 100명 넘게
그런데 나치범죄추궁센터는 수사를 마친 것이 아니다. 현 시점에서 3건이 기소 절차 진행중이어서 새로운 최후의 나치재판이 이뤄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단지 피고가 고령이기 때문에, 실현의 목표는 서지 않는다.
나치범죄추궁센터의 토마스 빌 소장은 언론의 취재에서, 소추대상이 될 수 있는 수용소 관계자의 이름이 100명 이상 가지고 있다고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매우 어렵지만 그들이 전쟁 후 어떻게 지냈고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현재 일의 초점이다」
나치범죄추궁센터는 조만간 나치 범죄의 기록을 후세에 전하는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할 것이 확실하다. 빌 소장은 조사할수록 얼마나 엄청난 수의 범죄를 상대하는지 알 수 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 기억은 계속 남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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