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전 미국대통령 외교정책 - 저평가 두가지 이유와 배경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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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카터 전 미국대통령 외교정책 - 저평가 두가지 이유와 배경 검증

by 소식쟁이2 2025. 1. 11.

카터 전 미국대통령 외교정책 - 저평가 두가지 이유와 배경 검증

* 우리에게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과 이에 따른 독자적 핵무장론 대두, 퇴임 후 방북하여 김일성과의 만남 등을 가졌던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에 관한  Foreign Policy Magazine과 뉴스위크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부터 중동 평화, 소련에 대한 대응까지 제39대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그동안 평가가 너무 낮았다?
보수파의 '약한 허리' 비판에 농락당한 면도 (대통령 집무실에서, 1977년) MARION S. TRIKOSKO-LIBRARY OF CONGRESS-REUTERS

대부분의 추모 기사에서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12월 29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한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은 외교정책에 있어 선견지명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조나단 알터(전 뉴스위크지 칼럼니스트)】

◆ 그의 공적은 쉽게 간과되지만, 그 영향은 중대하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징병 기피자의 사면, 파나마 운하의 반환 조약의 비준, 이스라엘·이집트의 평화조약으로 이어지는 캠프 데이비드 합의의 중개,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역사적인 인권 정책, 구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대응에 의한 냉전 승리에의 발판 등이다.

상징적인 실패로 여겨지는 주(駐)이란 미 대사관 점거 사건에서의 인질 구출 작전의 중지조차도, 실제로는 대실패라고 할 수 없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성립된 새 정부는 미국이 망명 중인 이란 샤(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암 치료 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에 격분하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이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자산 동결, 제재 부과하는 동시에 외교적 협상 시도했다. 1980년 4월, 군사 구출작전을 명령했으나 실패(헬리콥터 추락으로 미군 8명 사망) 했다. 미국 국민은 사건 초기에 카터를 지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감이 커짐에 따라, 이는 결국 카터의 재선 실패와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카터의 외교정책은 왜 이렇게 평가가 낮은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는 비개입주의 최고사령관이었다. 카터 행정부 시절은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이후 유일하게 전장에서의 총격도, 병사 사상자도 없었다. 이런 평화 편중과 대통령다움을 보여주는 연출 부족 탓에 약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생겼다.

두 번째 요인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포함한 보수파의 조직적인 저자세 캠페인이다.

◆ 파나마운하 반환 조약 비준
카터는 1977년 대통령 취임 첫날에 첫 눈에 띄는 공적을 남겼다.

징병기피를 위해 캐나다 등으로 도피한 사람에 대한 전면사면을 발령한 것이다. 베트남전이 끝난 지 2년도 채 안 된 사면은 장기화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대담한 결단이었지만 거센 비난을 받았다. 전임 제럴드 포드도 대선에서 카터에게 패한 뒤 카터가 취임 선서 전인 레임덕 기간 중 사면을 해달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거부했을 정도다.

카터는 비록 정치적으로 불리하더라도 항상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에 따라 행동했다.
파나마운하 반환조약 비준을 미 의회가 인정하도록 한 것도 한 예다. 1976년 대선의 공화당 지명 획득 레이스에서는, 파나마운하의 반환 반대를 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레이건이 현직의 포드를 위협하는 지지를 모았다.

카터도 조약비준을 위해 2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지만 용기와 정치적 수완을 구사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중동 평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했다. 1978년 9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도자를 미국으로 초청해 극비리에 평화협상을 주선한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13일간의 협상 중 양국 정상은 여러 차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귀국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카터의 놀라운 끈기에 따라 평화의 틀을 정하는 2개의 합의에 서명했다.

◆ 냉전 시대의 우선 순위와 충돌할 경우 위선적
하지만, 그들의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의는 깨져 버렸다. 그러자 반년 후, 카터는 측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방문해 평화의 틀을 재구축했다. 1979년 3월 26일 양국의 평화조약 서명이 성사됐다.

캠프데이비드 합의는 2차대전 종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된 외교적 성과가 됐다. 그의 중동에서의 성과는 그 어느 역대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라고 카터에게 조언했던 애버렐 해리먼 미국 외교관은 말한다.

[중국의 급성장 계기로]
카터의 공적은 아시아에도 미쳤다. 1972년 중국의 문을 연 사람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지만, 국교정상화로 그 문을 열고 실제로 통과한 사람은 카터다.

이는 필연적인 추세가 아니었다. 우파의 압력을 받은 닉슨과 포드는 실현 불가능한 '두 개의 중국'을 내세워 대만과의 단교와 중국의 완전한 외교 승인을 거치지 못했다. 그것을 1979년에 실현시킨 것이 카터였다.

카터가 그해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을 워싱턴으로 초청한 뒤 덩은 사유재산을 합법화했다. 일련의 개혁개방 정책을 계기로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뤘고, 미-중 관계는 현재 좋든 나쁘든 글로벌 경제의 기반이 되고 있다.

다만 카터는 재임 중에는 중국 내 탄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유명한 인권 이니셔티브는 일관되게 발휘된 것이 아니며, 냉전하의 우선 사항과 충돌했을 때는 종종 위선적이었다.

◆ 모스크바 하계올림픽 보이콧은 정치적 부담으로
카터가 인권문제를 처음 전면에 내세운 것은 1976년 대선이 한창이었다. 포드 행정부는 당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문제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보를 맡게 될 측근 리처드 홀브룩이 격렬한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카터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오래전부터 높이 평가했으며, 미국의 민권운동을 세계적인 움직임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외교자세가 냉전에 미친 영향의 중요성은 과소평가되고 있다. 반체제 극작가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 취임한 바츨라프 하벨은 카터의 인권중시가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자신을 고무시키고, 구 소련권의 자신감을 꺾었다고 말한다.

한편, 카터는 미-소 관계에 기존의 하드파워도 이용했다. 국방비를 대폭 증액했고, 국방부는 스텔스 전략폭격기 B2 스피릿과 GPS 등 기술을 개발해 나중에 레이건 행정부가 소련을 위협할 때 도움을 줬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 카터는 이듬해인 1980년 1월 국정연설에서 카터 독트린을 발표했다. 석유공급이 방해될 경우 페르시아만에서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으로 대(對)소련의 곡물 금수조치는 효과가 없었고,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의 보이콧은 애초부터 지지를 얻었지만, 곧바로 정치적인 부담이 되었다.

◆ 무자히딘에 몰래 무기 공급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부당한 평가다. 카터는 소련의 침공 전부터 이슬람 무장세력인 무자히딘에 몰래 무기를 공급해 소련이 지원하는 정부와 싸우게 했다.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나중에 소비에트의 베트남을 만들어 소련을 약화시키려 했다고 시인했다. 그 목적은 성공했지만, 20년 후에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의 창설자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하는 형태로 되돌아 왔다.

【환경문제에 대한 선견지명】
카터가 주력한 제2차 전략무기제한조약(SALTII)은 조인 후, 미 상원에서 비준이 부결됐지만 후의 미-소 군비관리를 획기적으로 전진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1980년 12월 퇴임을 앞둔 카터는 폴란드에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자주관리노조 연대의 레흐 바웬사 의장의 지지를 표명했다. 이윽고 동유럽 전역에서 소련이 지원하는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바웬사는 나중에 카터가 소련에 폴란드를 침공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투쟁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 최대의 좌절은 이란
카터의 외교정책에 가장 큰 좌절은 이란이지만 애초 1979년 이란 혁명을 그가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경기침체와 미국 민주당의 분열에다 미 대사관 점거사건으로 인질석방을 이루지 못한 것이 대통령 재선을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2016년 전기 집필을 위해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란을 폭격하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더라면 재선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전투에서 인질과 수천 명의 이란인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카터는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레이건이 철거한) 미국 최초의 포괄적 에너지 법안과 14개의 주요 환경법안에 서명해 외국산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는 길을 만들었다. 2기를 맞았더라면, 당시의 과학자가 「이산화탄소 오염」이라고 부르던 불명료한 문제에 대처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이것도 그의 정치적 비극 중 하나다.
카터가 미국을 상징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나쁜 대통령이나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분류는 의미가 없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의 무사무욕의 자세나 인도주의적인 공적은 칭찬할 만하지만, 재임중에는 세계를 형성하는 데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고결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이 인물을 지금이야말로 재평가할 때다.

From Foreign Policy Magazine
https://foreignpolic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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