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왜 '세계 제일의 암살국가'로 불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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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이스라엘은 왜 '세계 제일의 암살국가'로 불리는가…

by 소식쟁이2 2024. 8. 16.

이스라엘은 왜 '세계 제일의 암살국가'로 불리는가… 

2024년 7월 31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이슬람 조직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인 이스마일 하니야 정치국장이 암살됐다. 「이스라엘의 역대 수상은 특수부대의 출신자가 많고, 모사드 등 세계 최고수준의 첩보기관을 갖고 있으며, 암살은 상투적 수단」이라는 평가다

■ 태생적으로 싸우는 것이 의무다
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죽기 전에 죽으라'는 논리를 자신들의 행동지침으로 삼았을까요? 물론 어느 나라의 정치 지도자도 국가와 국민을 지킬 역할이 있습니다. 다만 특히 이스라엘의 정치인이나 정부 기관의 지도자들은 수십 년에 걸쳐 실제로 이 국가 방어의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던 적국(아랍 국가)과 지금도 공격을 계속하는 헤즈볼라, 하마스 등 적대 조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땅을 빼앗는 바람에 이스라엘을 강하게 미워하게 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바로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적'이 가까이 있는 이상, 현실 문제로 먼저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실제 감정은 이스라엘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은 태생적으로 싸울 것을 숙명 받은 국가입니다.

■역대 총리는 특수부대 출신이 많다
나라가 성립한 순간, 즉 건국 다음날부터 주변 국가들에게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된 다음 날, 주변국인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 국가의 군대가 이스라엘로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제1차 중동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이후 이스라엘은 4번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여러 번 직면해 온 것입니다.

이로부터 아래와 같은 논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국가를 가진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항상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고,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설사 세계를 적으로 돌려서라도 계속 싸울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총리를 비롯한 많은 정치지도자가 실전 경험이 있는 전직 군인입니다. 남녀 모두 징병제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전직 군인이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히 역대 이스라엘 총리에게는 군 중에서도 최전방에 서는 엘리트인 특수부대 출신이 여럿 있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특수부대원들은 군의 이데올로기를 체현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확실하게 상대를 죽이는 의식이 유난히 강한 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해군 특수부대나 공수부대 지휘관 등
예를 들면 현재의 베냐민 네타냐후 수상은, 이스라엘군의 최강 부대라고 부르는 세이어렛 마트칼(Sayeret Matkal, 이스라엘의 특별 정찰부대)의 전직 부대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프탈리 베넷 총리(2021-22년), 에후드 바라크 총리(99-01년)도 세이어렛 마트칼(Sayeret Matkal) 출신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총리 다음으로 국방장관이 중요한 각료로 꼽히고 있지만, 요압 갈란트 네타냐후 정권의 국방장관도 해군 특수부대로 유명한 샤예테트 13의 전직 대원으로 이슬람 무장조직 간부의 암살작전에 여러 차례 투입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2000년대에 총리였던 아리엘 샤론 총리는 군 엘리트인 공정부대 지휘관인데, 원래 하가너라고 부르는 과거 유대인 군사조직 대원이었습니다. 하가너는 지금의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초석이 된 조직으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 합의로 유명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도 시몬 페레스 총리도 이 하가너의 대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이 실전경험이 있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실전에서 부상을 입었고, 같은 특수부대원이었던 형은 작전에서 사망한 '영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전장 경험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군인 정치의 국가입니다. 적어도 국가의 역대 지도자 중에 이만큼 특수부대 대원이나 군인이 있는 국가는 다른 예가 없습니다.

■ 유대인 피의 역사 '마사다 요새'
또 가자에서 싸우는 이스라엘 국방군 병사들도 죽이지 않으면 죽겠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현하는 것으로 병사로서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병사들은 마사다 요새라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입대 선서식을 거행합니다.

마사다 요새는 사해 리조트에서 차로 바로 갈 수 있는 산 위의 요새로 로프웨이에서 산 정상에도 오를 수 있는 관광지로 알려져 이스라엘의 웅장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곳에서 보이는 경치의 훌륭함과는 달리 사실 이 요새는 유대 민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당시 유다 왕국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마사다에는 저항을 계속했던 유대인 1000여 명이 3년여 동안 농성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집단 자결했습니다. 먼저 처자를 죽인 유대 병사들은 뒤이어 서로를 죽였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마사다는 유대인 조상들이 다른 세력에 몰려 죽음으로 내몰린 비극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 '마사다는 다시는 함락되지 않는다'고 맹세하게 한다
이스라엘군은 바로 이 자리에서 비극은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아 '마사다는 다시는 함락되지 않는다'를 표어로 삼아 신병들에게 나라를 지키는 맹세를 하게 합니다. 즉, 우리는 다시는 적에게 파멸당하지 않을 것이며, 유대 국가를 절대로 사수할 것이라고 맹세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자에서 싸우고 하마스 전투원과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이렇게 맹세한 병사들입니다.

유대인의 고난은 마사다의 비극만이 아닙니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정도 전에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 많은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원전 13세기경 이집트를 탈출, 기원전 10세기경 유대왕국을 건국하지만 이후 신바빌로니아 왕국 네부카드네살왕의 침략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세계사에 기술되어 있는 '바빌론의 속국'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을 허락받았지만, 이어 로마의 침략을 받아 마사다의 비극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사다 이후 유럽 등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후에도 인류사의 오랜 차별과 박해에 시달리게 됩니다.

■ '예수 죽인 유대인' 폄훼된 대부업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역사 수업에서 배운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특히 유럽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입니다. 그럼 애초에 유대인들은 왜 계속 박해를 받았을까요?

큰 이유는 유럽은 기독교인의 사회였고, 유대교도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약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것이 유대인이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대인들은 차별받고 박해받아 왔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자신도 유대인이었고, 그는 유대교의 개혁자였습니다. 즉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단으로 태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주 옛날에는 이단이었던 기독교가 이제 완전한 주류파가 된 유럽에서는 유대교도는 소수파에 불과해 사회에서 배제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의 생업(직업)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고, 적지 않은 유대인들은 대부업을 하며 유럽의 서민부터 귀족까지 폭넓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빚을 떼이는 경우도 많았지만, 많은 채무자로부터 원한을 사기 쉽고, 사회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희생양이 되기 쉬웠습니다.

■ 나치 대량학살로 '나라 없으면 죽는다'
예를 들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유대인은 대부업을 하는 샤일록과 같은 악역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에게는 모욕적인 내용의 희곡입니다.

그러한 수백 년에 걸친 부당한 차별, 박해가 계속되어 마침내는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대학살도 경험하게 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제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대학살, 이른바 홀로코스트입니다.

무려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살해당하고 맙니다. 유럽에 있던 유대인 3명 중 2명이 살해되는 엄청난 대학살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에서 독일의 패배로 홀로코스트는 끝나지만 유대인들은 오랜 박해와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나라가 없으면 유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없다. 신변의 안전은 지킬 수 없다고 강하게 결의한 것입니다.

이 결의와 홀로코스트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결실을 맺어 제2차 대전 후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향한 움직임이 가속화됩니다. 시오니즘은 1896년 빈 출신의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저서 『유대인 국가.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를 출간하면서 정치사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 '성경에 적힌 땅'에는 아랍인이 살고 있었다
헤르츨은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편견으로 스파이 혐의를 받고 종신형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드레퓌스는 결국 무죄가 되었지만, 이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유럽 사회에서 설 자리를 찾았지만, '역시 우리는 나라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주위의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고 절감하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건국의 땅으로 선택한 것이 팔레스타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땅이고, "하나님이 유대 민족에게 주신 땅"입니다. 즉 "성경에 쓰여진 약속의 땅"이라는 유대인에게만 통용되는 이야기가 이용되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수많은 아랍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영국 등 당시 강대국의 힘을 이용해 그곳에 자신들의 유대 국가를 세워 안전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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