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100년, 이탈리아 독재자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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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경영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100년, 이탈리아 독재자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나?

by 소식쟁이2 2022. 10. 24.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 100년, 이탈리아 독재자는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나?

1922년 10월 이탈리아에 폭풍이 몰아치려 하고 있었다. 국민의 불만을 원동력으로 민족주의 포퓰리즘 폭력을 혼합해 전개되는 파시즘이라는 정치운동이 이 나라를, 그리고 세계의 많은 부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미 많은 지지를 받아 정부에 정권을 양보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24일 나폴리 전당대회에서 연설한 무솔리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계획은 심플하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지배를 원한다"며 지지자들에게 만약 정부가 사임하지 않는다면 로마로 진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흘 뒤 무솔리니는 이를 실행에 옮겨 집권했다.

무솔리니의 이름은 지금도 이 나라에서 잔인한 독재자로 거론되는 반면 일부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솔리니는 어떻게 집권했는지,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를 무너뜨린 그 진군에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 참전을 원했던 사회주의자
1883년 7월 29일 무솔리니는 남이탈리아의 작은 거리에서 대장장이 아버지와 교사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로부터 민족주의와 정치적 히로이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내성적이고 교제가 서툴렀던 그는 어려서부터 동급생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등 말썽을 부렸다. 청년이 된 그는 스위스로 건너가 사회주의자를 공언하게 된다. 이윽고 이탈리아로 돌아오자 사회주의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유럽 각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당초 중립을 유지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참전을 원했기 때문에 소속되어 있던 이탈리아사회당과 대립했고, 당은 전쟁 지지를 이유로 그를 제명 처분했다. 이에 맞서 무솔리니는 독자적인 정치운동 혁명행동 파시를 일으켜 전쟁 참가를 호소했다(이탈리아는 1915년 참전하게 된다).

고대 로마에서 파시라는 단어는 나무를 묶거나 도끼 주위에 나무다발을 묶어 만든 무기를 의미했다. 로마 관리들이 범죄자를 처벌할 때 사용되었기 때문에 파시는 국가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 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말은 공통의 목적에 따라 맺어진 정치적 집단에 대해 쓰이기 시작했다.

무솔리니는 이후 점점 사회가 강력한 국가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강화해 갔다. 그는 '냉혹하고 정력적인' 독재자만이 이탈리아의 '대청소'를 이뤄내고 신뢰할 만한 국가로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 파시즘의 지지 확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무솔리니뿐만이 아니었다. 제1차 대전 이후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영토 분할을 규정한 이 조약에서는 이탈리아가 경시되고 매우 적은 몫만 배정받았다고 국민은 느끼고 있었다. 이 「훼손된 승리」가, 그 후의 이탈리아를 형성해 가게 된다.

1919년 무솔리니는 혁명행동 파시를 바탕으로 준군사조직 이탈리아 전투 파시를 만들었다.

무솔리니의 의도는 국민의 불만을 바탕으로 정치적 성공을 거두려는 것이었지만 그해 의회선거에서 창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당은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사회당의 180만 표에 비해 무솔리니의 당 득표수는 불과 2420표에 그쳤다.

그래도 무솔리니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사회주의자와 대립하던 다른 집단에 대한 압박을 시작했다. 가령 파업이나 사보타주를 두려워하는 생산업체나 사업가, 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방 지주, 사회주의의 인기 고조를 두려워하는 정당 구성원 등이다.

새로 획득한 강력한 동맹자들 덕분에 무솔리니는 자신의 민병대인 검은 셔츠부대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검은 셔츠부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폭력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드러냈다.

검은 셔츠부대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전국의 사회주의자나 무솔리니 개인의 적이었다. 1920년은 유혈의 해가 되어 파시스트들이 마을을 활보하며 노동자 지도자들을 때리고 심지어 살해하고, 사실상 지방자치를 장악해 나갔다. 그런데도 파시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을 적대시하던 이탈리아 정부는 폭력을 막기 위한 노력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 무솔리니의 대두
이루 두체(지도자)로 불린 무솔리니는 국민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개인적 매력과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921년 무솔리니는 국회에서 의석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총리 조반니 졸리티로부터 연립정부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졸리티는 정치권력의 일부를 나눠주면 무솔리니가 검은셔츠부대를 얌전히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졸리티는 무솔리니를 잘못 읽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목적은 검은 셔츠부대를 이용해 절대적인 지배권을 잡는 것이었다. 1921년 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전투 파시를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고쳤고, 1920년 약 3만 명이던 운동을 32만 명의 당원을 둔 정당으로 발전시켰다. 무솔리니가 이미 국가에 대해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정부는 당을 해산시키지 못하고 북이탈리아의 대부분을 파시스트당이 점거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 로마 진군
1922년 10월 25일 나폴리에서 열린 전당대회 다음날 무솔리니는 4명의 당직자를 시켜 당원들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군시켰다. 훈련도 무장도 미흡했던 이들은 이탈리아군과의 싸움에서 패할 공산이 컸다. 그래도 무솔리니는 정부를 위협해 복종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밀라노에서 대기했고, 그 사이 그의 지지자들은 집결해 갔다. 로마로 향하는 도상에서 그들은 통과하는 거리의 정부청사를 점거하는 등의 혼란을 일으켰다. 진군에 참여한 당원 수에 대해 당의 발표는 항상 넉넉하게 잡혔지만 역사가 케이티 헐은 그 수가 3만명이 채 안 됐다고 지적했다.

당시 총리 루이지 팩타가 계엄령을 발령하려 했으나 무솔리니에게 맡김으로써 안정을 꾀하려 했던 국왕은 파시스트 진압에 해당하는 이탈리아군을 동원하기 위한 명령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팩터와 내각은 10월 28일 아침에 총사퇴했다. 국왕의 조각을 명령하는 전보를 손에 쥔 무솔리니는 침대열차에 올라 밀라노에서 로마까지 14시간에 걸쳐 유유히 이동하다 10월 말 총리에 취임했다.

◇ 무솔리니의 조락
세계대전과 국내 내전상태에 피폐해진 국왕은 무솔리니가 질서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3년도 안 돼 이 남자는 완전한 독재자가 돼 간다.

무솔리니는 점차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키면서 국민의 권리를 조금씩 깎아내리고 프로파간다적 경찰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무솔리니의 계획은 국내 지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제국주의적 야망 아래 이탈리아는 그리스의 코르푸섬을 점령하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어 마침내 국민 8500명을 홀로코스트 희생에 이르게 한다.

무솔리니의 야망이 이윽고 그 조락을 불렀다. 그는 이탈리아를 추축국으로 삼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키고 파죽지세의 아돌프 히틀러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로 인해 모국에 큰 파괴를 가져왔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측근을 설득해 그에게 적대하도록 했고 1943년 7월 25일 마침내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그를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극적인 탈옥 후 무솔리니는 독일 점령하의 이탈리아로 도망쳐 히틀러의 압력 아래 단명의 괴뢰국가를 세웠다. 1945년 4월 28일 연합국의 승리가 임박한 가운데 무솔리니는 국외 도피를 시도했으나 공산주의자인 빨치산에게 발견돼 사살되고 그 시신은 밀라노 광장에 버려졌다.

곧이어 모여든 군중은 오랜 세월 쌓인 증오와 상실감을 터뜨리듯 독재자의 시신을 훼손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거의 판별할 수 없게 된 시신은 결국 무명의 무덤에 묻혔다. 이루 두체는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이탈리아인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파시스트 운동은 이탈리아의 국내 정치, 그리고 국제 구상 모두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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